ⓒ https://ccoli.co/@lia4682/11903
“샬~롯! 왕성 내 숨바꼭질 최강자 씨!”
불쑥, 샬롯의 앞에 갈색 머리통이 동동 나타난다. 프라우가 천장에 매달려서 거꾸로 샬롯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라우, 님?”
정말로 별안간, 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등장이었다. 샬롯은 몸을 움츠린다. 프라우는 재미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샬롯을 대한다.
“으응, 아카데미 때 친구가 찾아온 모양이던데? 응접실에 한 번 가 봐.”
린이랑 같이. 프라우는 어느새 천장에서 내려왔다.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 똑바로 샬롯을 쳐다본다. 샬롯은 제대로 프라우를 마주하지 못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짙은 푸른색 보닛을 잡아, 끌어내렸다. 프라우는 제 뺨을 긁으며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곤 유유히 블레이드를 타고 공중으로 사라졌다.
친구, 친구라. 아카데미 때 친구. 샬롯은 자신에게 다가와 주었던 고마운 얼굴들을 상기한다. 생각나는 얼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올 리가 없을 텐데. 샬롯은 정령들에게 둘러싸여서는 린의 방으로 걸어갔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누굴지, 린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누가’ 왔는지보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집중했다. 린은 아카데미 시절을 상기하다가 곧 신나는 얼굴이 되었다. 상당히 활달하게 조잘거리며 아카데미 시절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카데미 내부에 숨겨진 던전을 찾은 건 정말 재밌었지, 린이 한껏 고양된 얼굴로 그렇게 말했고 샬롯은 부정할 수 없었다. 린과,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이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샬롯은 어느새 응접실 앞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 자리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자는 상당히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샬롯은 옆에서 자신을 부추기는 린의 얼굴을 마주했다가 다시금, 응접실에 앉아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저 멀리 바라보고 있었기에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샬롯은 침음한다.
“린, 이건… 유즈와 저만이 풀 수 있는 문제일 것 같아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리를 조금, 피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주 조심스럽고 정중한 어조에 린은 가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린은 직감적으로 유즈와 샬롯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몇 가지 정도 끼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전에도 느낀 것이었지만, 샬롯과 린은 같은 시야를 공유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품성의 차이가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을까. 린은 고심하다, 유즈는 린을 볼 수 없지만 샬롯은 린을 볼 수 있는 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면 나는 저기에 가 있을게, 내가 방해되는 건 아니지?”
샬롯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샬롯은 응접실에 앉아 있는 이에게로 걸어간다. 유즈가 샬롯을 발견했을 때, 샬롯은 부드럽게 웃으며 유즈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즈와 샬롯의 자리에는 각각 차와 코코아가 놓여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샬롯은 한 번 운을 뗀다.
“유즈.”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퍽 떨리고 있었다. 유즈의 입매는 움찔대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원래의 성정이라면 샬롯에게 무언가를 쏘아붙이기라도 했을 텐데, 일전의 일 때문인지 억누르고 있는 것이 눈에 선했다.
그래, 그러고 보면 유즈는 예전부터 그랬어. 샬롯은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 뒤로 슬금슬금 웃어본다. 남의 항상성을 보는 것은 종종 노스탤지어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샬롯은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
“샬롯.”
익숙한 목소리에 샬롯은 가만히 눈을 떴다. 저 멀리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바다 내음을 품어 소금 냄새가 났다. 유즈가 일하는 곳이기도 했고, 린이 볼일이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놀러 온 제3마탑은 바다를 건넌 곳이었던지라 더더욱 그랬다. 자잘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바야흐로 가을의 초입이었다. 감히 계절풍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샬롯은 점차 옷을 벗어가는 나무 아래에서 앉아 있었다. 샬롯은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유즈?”
이름을 불린 아이는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낯으로 샬롯을 맞았다. 샬롯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조금 답답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샬롯은 뭐라 붙일 말이 없어, 말을 삼켰다.
“하, 샬롯. 또 이런 데에 있었구나.”
엘펜하임의 가을은, 그 추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 서서히 준비에 돌입하는 시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엘펜하임의 거주민들은 이 시기에 필요 이상으로 냉랭했고, 그 차가운 사람들 사이에서 샬롯은 말 한 번 못하고 자신을 잃었다. 숫기 없는 소녀는 이따금 하늘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것은 한 번, 두 번 그리고 계속 겹쳐서 결국은 습관이 되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린과, 유즈와 그리고 샬롯. 유즈는 익숙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샬롯은 그것을 천천히 잡고 일어났다.
“고마워요, 유즈…”
샬롯은 말끝을 흐렸다. 유즈는 긴 한숨과 함께 미간을 좁혔다. 그 얼굴에는 피곤함이 매달려 있었다. 샬롯이 그걸 모를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유즈는 부쩍 어두운 낯으로 린과 샬롯을 맞았다. 그 안색을 본 린이 조심스럽게 아발론행을 권했으나 유즈는 입술을 깍 깨물고서는 자신은 여기가 더 맞고, 네가 그러는 건 동정 그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때, 샬롯은 자신들의 관계가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답답하게 굴지 마, 샬롯.”
유즈는 샬롯보다 보폭이 넓어 금방 걸어갈 수 있었을 텐데도 샬롯과 발을 맞추어 걸었다.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말은 온도가 달랐다. 고압적이지만 걱정 섞인 목소리를 듣는다. 샬롯은 여전히, 유즈의 말에 담긴 다정한 속뜻을 알아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가시 돋친 말들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오래도록 심장 한구석에 남아 머리를 맴도는지. 유즈는 알고 있을까. 유즈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선가 꺼내온 담요를 샬롯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가을이라도 추워, 몸 따뜻하게 하고 다녀. 너 엘펜하임 하루 이틀 있었니?”
유즈의 코끝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샬롯은 작게 고마워, 라고 언질을 주었다.
샬롯은 정말로 오랫동안, 엘펜하임 이외의 세계는 알지 못했다. 바다 건너의 이야기, 왕녀라던가 종신 통령이라던가, 그런 것들은 그녀에게 있어 별세계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좁디좁은 세계에서, 린과 유즈만이 샬롯 그레이스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의 뒤에 숨는 것이 일상이 된 것은. 샬롯은 분명 실력자였지만, 늘 나서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천재 마도 공학자의 반열에 들기 충분한 린, 투덜대는 것 같으면서도 샬롯의 능력을 펼쳐야 할 때는 나름 도움을 주는 유즈, 그리고 샬롯의 진가를 알아보는 몇 교수님들.
알고 지내던 교수가 혼돈의 종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유즈와 린 그리고 샬롯은 대책 회의를 잠시나마 가진 적이 있었다. 린은 열띠게 그 교수를 어떻게 끌어내릴 수 있을지 열변을 토했고, 샬롯은 린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며 이따금 주장에 살을 붙여갔다. 유즈는 그 옆에서 슬며시 인상을 구기고서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나은 방안을 제시해주고는 했다. 그렇게 뜨겁다면 뜨거운 시간이 끝난 후, 그들은 각자의 잠자리로 향했다.
유즈는 그날따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잠자리에서 나와 베란다로 향하자,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유즈를 보더니 잘게 웃었다.
“조금, 떨리는 기분이에요..”
샬롯은 어색하게 웃었다. 샬롯과 유즈의 숨결이 차가운 공기에 닿아 산산이 부서진다. 유즈는 달빛에 비친 샬롯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샬롯, 너는 좀, 이런저런 귀찮은 면이 있어.”
샬롯은 물끄러미 유즈를 바라본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어차피 결과가 증명해 줄 테니까.”
샬롯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샬롯과 유즈는 각각 상념에 잠겨 칠흑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기묘한 관계를,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걸까. 샬롯은 아무 말 없이 유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유즈는 입을 달싹이다 곧 그만두었다. 한두 마디 말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묘하게 어긋나는 대화를 곱씹으면서 샬롯은 진지한 어조로 묻는다.
“유즈.”
유즈는 생각에서 벗어나 샬롯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희, 얼마나 더 같이 있을 수 있을까요?”
유즈의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은 소리가 났다. 샬롯의 말을 진지하게 들은 것인지 의심되었다. 그러나 샬롯은 구태여 말에 살을 붙이지 않았다.
“뭐, 될 수 있을 때까지.”
샬롯은 조금 웃는 것 같았다.
*
…샬롯은 아카데미의 일까지 생각한 후 다시금 자신 앞에 있는 이를 바라본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샬롯은 무의식중에 입을 닫고 머릿속에서 미리 할 말을 정리했다. 유즈는 보채지 않고 그 말을 찬찬히 기다려 주었다. 샬롯은, 그래서 유즈를 이제껏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것을 슬며시 깨닫게 된다. 샬롯은 응접실에 기본적으로 비치해 두었던 코코아 가루로 탄 코코아를 바라본다. 유즈가 타 주었던 것과는 본질부터가 다르지만, 어쨌건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샬롯이 되고 싶은 모습들은 아발론에 잔뜩 있었으므로 샬롯은 아발론을 사랑하게 되었다. 짙은 갈색 수면에 자기 얼굴이 비치는 것을 바라본다. 샬롯은 다시금 밀려오는 상념에 잠겨 든다.
이번에는 조금 더 최신의 것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
‘엘펜하임의 겨울을 이기지 못하는 엘프는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엘펜하임에 있어서 추위란, 일상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당연했다. 아무리 하프 엘프라 하더라도 그러한 편견은 당연히 적용되는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누군가의 집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샬롯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얀 숨이 공중에 바스러질 즈음, 등 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샬롯! 너 왜 밖에 있었어, 이런 날씨에!”
샬롯은 마시멜로가 동동 띄워져 있는 코코아를 받아서 들었다. 컵이 따스했다.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말을 뱉어낸 유즈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즈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일종의 걱정이 낯빛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지만, 최근 상사의 갈굼이나 연일 이어지는 연구 거리를 생각하다 보면 두통이 가시질 않았다. 마도 공학이 발달한 국가답게 나름 엘프용 진통제가 있음에도 잘 들지 않아 종종 잠을 설치곤 했다.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샬롯은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유즈.”
나지막이 유즈의 이름이 불리자, 유즈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몸을 조금 떨었다. 샬롯이 어떤 말을 할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육감이 알아챈 것 같았다.
“늘 궁금했던 거지만, 지금에서야 물어볼 수 있게 되었네요. 저는, 유즈에게 뭐였나요?”
유즈는 집 안에 맴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맛보며 입술을 적셨다. 샬롯은 그 둥글고 짙은 눈으로 유즈를 바라보았다.
“친구였지, 아주… 소중한.”
무언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유즈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없어야만 했다. 과거, 처음 샬롯과 관계를 맺었을 때만을 생각하며 그간의 변화를 애써 무시해 왔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안색이 일순 파리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예년의 대화처럼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한낱 이기심이나 질투 따위는 한 꺼풀을 벗고 부끄러울 정도로 멀끔하게 상대에게 전해진다.
“유즈, 저도 유즈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요. 소중하고. 하지만 유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변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샬롯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평소에 짓던 편안한 사람의 미소와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유즈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샬롯은, 컵 안에 든 내용물을 비우고 일어섰다. 빈 컵 안에서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노력, 한다고 했었죠?”
샬롯은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하곤 유즈의 집을 나섰다.
“죄송해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일말의 찝찝함을 가득 남겨두고서 샬롯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샬롯이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 유즈는 샬롯이 앉아 있던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
그 모든 생각을 마친 샬롯은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그녀가 아발론에 찾아온 이유는 자명했다.
“유즈, 유즈는 좋은 사람이에요.”
샬롯은 진심이었지만, 유즈는 그렇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알고 있고, 노력하려는 것 알고 있어요. 지금도 제 말을 끊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거죠?”
유즈는 움찔, 하고 몸을 떤다. 린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응접실 바깥에서 샬롯을 바라본다. 그런 것도 아느냐, 같은 눈빛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샬롯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건, 정말로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전히,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것도 있을지도 몰라요.”
“…”
유즈는 샬롯의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다문 입매에서 지금 느끼는 감정 따위를 알 수 있었다.
“… 나는 오늘부터 일주일 정도 이 근처에서 머물 거야. 더 할 말 있으면, 그 안에 다 해.”
“샬롯은 어른스럽네.”
린은 둥글고 빨간 눈동자를 바라본다. 노란 눈 안에 빨간 눈동자가 고스란히 담긴다. 샬롯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한 발짝 물러섰다. 린은 전혀 멋쩍지도 않은 음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가끔, 샬롯이 언니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
샬롯은 샐쭉 웃었다. 그 모습을 유즈는 조금은 멍하니 바라보다 아발론의 왕성을 나섰다. 유즈는 대체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거의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사색은 분 단위로 잴 수 있을 만큼 짧은 것일 수가 없었다. 생각에 물꼬를 트자 이제껏 어떻게 참았냐는 듯이 거침없이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 유즈는, 관계의 정립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그렇다고 해도 부수어진 유리컵이 저절로 다시 붙지 않는 것처럼 관계도 그러하였다.
그 일주일 동안, 유즈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유즈는 조금의 미련을 항구에서 가슴에 담고 있었다. 예약해 두었던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에 배에 승선했다.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유즈는 다시금 깨질 것 같은 두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바닷바람이 자신의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가는 것을 온전히 느꼈다.
샬롯은 귀 뒤로 머리칼을 조금 넘긴다. 화원에 차 향기가 가득 퍼져나간다. 샬롯이 군주에게 면담을 청한 것은 퍽 오랜만이라, 로드 또한 그녀가 뱉을 말을 기대했다. 조금 더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방증이리라. 샬롯은 그 기대감을 한 몸에 받으며 할 말을 신중히 골랐다.
“로드께서 말씀해 주신 거절하는 법을 사용해 봤는데요.”
로드는 부드럽게 찻잔을 들고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샬롯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게 어렵다고 했었지. 로드는 샬롯의 말을 기억해내고, 찻잔을 빙글빙글 돌려 찻물의 내음을 음미한다. 진중하지만 지나치게 격식 있지는 않은, 그런 허브티였다.
“좋았어요.”
샬롯은 말을 더 이어 나갈 것 같더니,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로드는 샬롯의 심정을 막연히 넘겨짚을 뿐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인연이라면, 샬롯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건 꽤 공허하고도 슬픈 일이었겠지.
샬롯은 침묵으로 그의 군주를 마주하다 면담 시간을 다 사용하고 말았다.